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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작성일2017-03-25 조회1,658 추천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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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자 : 하치야 쿠니오

* 동경대학 문학박사
* 일본도교학회 명예 이사
* 동경대학 명예교수
* 주요 저서 : 『금대도교연구(金代道教研究)』, 『금원시대(金元時代)의 도교』, 『도해잡학노자(圖解雑学老子)』, 『중국사상이란 무엇일까』, 『중국의 사유』, 『장자=초속(超俗)의 경지로』, 『노장(老荘)을 읽다』, 『노자(老子)』, 『NHK 종교의 시간 「노자」 「장자」를 읽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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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典經)』과  『노자(老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저로서는 매우 의미 깊은 하루입니다. 이런 영예와 기회를 주신 여러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드릴까 고민했었는데, 최근 몇 년간 제가 주로 연구를 하고 있는 분야가 노장(老莊) 사상이기 때문에, 『전경』과 『노자』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 노자(老子)는 『전경』에 등장하는가?

 

  『전경』속에 공자나 석가는 나오고 있습니다만, 노자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상제께서는 노자에 대해 잘 알고 계셨습니다. 직접은 아니나 간접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습니다.「행록」 5장 20절에는, 아마 화천하신 해일텐데요, 1909(기유)년 6월에 상제님께서 청도원에 있는 김송환의 집에서 신경원을 만나셨을 때,「네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 하시고, 양지 한 장을 주어 유(儒)ㆍ불(佛)ㆍ선(仙) 석 자를 쓰게 하시고, 또 친히 유 자 곁에 이구(尼丘), 불 자 곁에 서역(西域), 선 자 곁에 고현(苦縣)이라 쓰신 다음 그 양지를 불사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구, 서역, 고현이라는 것은 공자, 석가, 노자의 출생지입니다.
  『전경』에는‘도교’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지만, 대신에 ‘선도(仙道)’나 신인, 선인, 선녀, 선술, 선경 등의 단어가 비교적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상제님의 사상에서는 유·불에 대응하는 것이 ‘도’가 아니라 ‘선’일 뿐이고, 그 창시자 또는 대표자는 노자이겠지요. 우리(학자)들은 유·불·도 3교라는 식으로 부르나, 『전경』에서는 유·불·선이 한 묶음이 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선은 무병장수를 가져다 주고, 후천의 선경이라는 것은 이른바 이상향입니다. 상제께서는 당신을 신선으로 표현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선(仙)을 대표하는 인물인, 노자는 그 이름만 나오지 않고 있을 뿐, 상제님의 사상에서 지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전경』속에 『노자』는 어느 정도로 사용되고 있는가? 또는 쌍방에 얼마나 닮은 표현이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합시다.
  다만, 구체적인 사례들 사이에는 맥락이 없을 것이므로, 이야기는 병렬적으로 늘어놓는 식이 되겠습니다.  


2. 『전경』과 『노자』가 통하는 점
 
  「교법」 1장 28절에, 상제께서 까닭 없이 오해를 받고 구설을 사서 분개하는 사람을 가리켜「바람도 불다가 그치나니 남의 시비를 잘 이기라。동정에 때가 있나니 걷힐 때에는 흔적도 없이 걷히나니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는 기술이 있습니다. 이것은, 『노자』 23장의「회오리바람도 아침 내내 부는 것은 아니고, 폭우도 하루 종일 내리지는 않는다.」와 매우 닮아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노자』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했다’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떤 날씨가 바뀌지 않고 계속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상식이므로, 누구라도 이러한 것은 말할 수 있고, 듣는 사람도 그 의미를 이해합니다. 일본에는 ‘더위도 추위도 피안(彼岸:춘분과 추분을  전후한 며칠의 기간)까지’라는 속담이 있는데요, 확실히, 아무리 더운 시기도 지내다 보면 서늘해지고, 아무리 추운시기도 지내다 보면 따뜻해집니다. 한국과 중국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겠지요? 동아시아의 사람들은 같은 몬순 기후대에 살고 있어서, 비슷한 계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씨변화에 민감하고 날씨를 비유로 사용하는 것도, 비슷한 기후환경이 그 배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일 년 내내 혹서(酷暑) 또는 극한(極寒)인 지대에서는 아마도 다르게 인식하고 표현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운」 1장 16절에는, 상제께서 원일에 대하여 성인의 도와 웅패의 술에 대해 가르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제생의세(濟生醫世)는 성인의 도요 재민혁세(災民革世)는 웅패의 술이라. 벌써 천하가 웅패가 끼친 괴로움을 받은 지 오래되었도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상생(相生)의 도로써 화민 정세하리라. 너는 이제부터 마음을 바로 잡으라. 대인을 공부하는 자는 항상 호생의 덕을 쌓아야 하느니라. 어찌 억조창생을 죽이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 합당하리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인의 도’라고 하는 것은 노자적이라기보다는 유가적 느낌입니다만, 웅패적인 생활방식에 대한 비판은 『노자』에서도 채택되고 있습니다. 『노자』 72장에 ‘성인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스스로 견식이 있다고 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므로 스스로 고귀하다 하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마음에 잡념이 없고 다만 배를 채우는 정도의 소박하고 무욕한 존재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고귀하다 하는 것은 고귀한 지위를 바라고 욕망을 키워간다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고귀하다고 하게 되면, 75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백성으로부터 많은 세금을 징수하거나, 여러 가지 쓸데없는 행정명령을 반포하거나, 자신의 생활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창생을 죽이려고 한다고 까지는 말할 수 없으나 이와 같은 ‘위에 서는 자’ 때문에 ‘백성은 굶주리고’ 그 결과 백성들은 자포자기가 되어 ‘죽음을 가벼이 여기게’된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실질적으로 죽이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웅패의 권력자는, 실로 수많은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가면서, 자신만은 죽음의 울타리 밖에 위치하고자 하는 제멋대로인 사람입니다. 단, 이러한 권력자에 대하여 가지는 반감은 일반적인 것으로, 상제님이나 노자에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교운」 1장 17절에는, 학교교육에 대한 비판이 보입니다. 「이 세상에 학교를 널리 세워 사람을 가르침은 장차 천하를 크게 문명화하여 삼계의 역사에 붙여 신인(神人)의 해원을 풀려는 것이나, 현하의 학교 교육이 배우는 자로 하여금 관리 봉록 등 비열한 공리에만 빠지게 하니 그러므로 판 밖에서 성도하게 되었느니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우는 것 그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배우는 목적이 공명이득을 얻기 위함에 한정되어 있는 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노자』 48장에서는 ‘학문을 연마하는 사람은 매일 여러 가지의 지식이 늘어가지만, 도를 연마하는 사람은 매일 여러 가지의 욕망이 줄어 간다. 욕망을 줄이고 또 줄여서 어떤 것도 행하지 않는 경지에까지 이르러라.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아 오히려 모든 것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배우는 것 자체가 비판되고 있습니다. 이는 노자의 독특한 철학에 근거한 사고방식이고, 상제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다르지만, 「판[世間] 밖에서 성도하게 된다.」는 점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강함을 멀리하고, 부드러움을 귀하게 여기는 사상

 

  「행록」 3장 49절에는, 정미(1907)년 겨울에 상제께서 김형렬에게 시를 주시는 장면이 보입니다. 그 시는 「처세유위기(處世柔爲貴) 강강시화기(剛强是禍基) 발언상욕눌(發言常欲訥) 임사당여치(臨事當如癡) 급지상사완(急地尙思緩) 안시不망위(安時不忘危) 일생종차계(一生從此計) 진개호남아(眞皆好男兒)」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부드러움을 귀히 여기고, 강함을 멀리하는 사상이 보입니다. 이는 『노자』 사상의 큰 특징의 하나로, 적어도 제1구와 제2구는 노자의 사상 그 자체입니다.
  『노자』에는 36장에 ‘유약(柔弱)은 강강(剛强)을 이긴다’라고 분명하게 얘기되고 있는 이외에도, 28장에 ‘강함을 알면서도, 유약한 입장을 지켜나가면 세상 사람들이 경모하여 모여드는 골짜기가 된다’, 43장에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을 움직이게 한다. 모양을 갖지 않은 것이 틈도 없는 곳에 들어간다.’, 76장에 ‘사람은 살아있을 때는 부드러워 잘 휘어지나, 죽었을 때는 굳어져 뻣뻣해진다.  … 그러므로, 굳어져서 뻣뻣해진 것은 죽음과 한패요, 부드러워 잘 휘어지는 것은 생과 한패다. 이러한 이유로, … 강하고 커다란 것은 하위(下位)가 되고, 부드러워 잘 휘어지는 것은 상위(上位)가 된다.’등, 유약을 존중하고 강강(剛强)을 멀리하는 구절은 매 권마다 나오고 있습니다.
  어째서 유약이 이렇게 존중되는 것일까요? 40장에는 ‘근원(根元)으로 회귀하는 것이 도의 운동이고, 유약한 것은 도의작용이다’ 라고 나옵니다. 보통의 부드러움이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부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52장의‘유약을 지켜 나가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는 말처럼, 유(柔)는 강(强)조차도 취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상제께서 가르치신 유(柔)를 취지로 하는 처세의 태도는, 일본에서 ‘버드나무는 눈에 부러지는 일이 없다’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데, 그 근저에 노자의 사상을 깔고 있다고 해도 그리 벗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발언상욕눌(發言常欲訥)’ 이하의 시구에는 노자적이라기 보다는 유가적 또는 병가적 느낌이 듭니다만, 유명한 ‘강하고 굳세고 질박하고 어눌함이 인(仁)에 가깝다’(「논어」자로편)는 구절뿐만 아니라, 『노자』에도 45장에 ‘대단한 변설은 어눌하게 보인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임사당여치(臨事當如癡)’ 의 치(癡)는 우(愚)라는 의미로, 『사기』「노자전」에는, 공자가 주[周, 낙양(洛陽)]에 가서 노자에게 예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노자는 “군자는 훌륭한 덕이 있어도 용모는 어리석은 자와 같다”라고 가르쳤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치우(癡愚)는 노자뿐만 아니라 대개의 도가 사상가들이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김형렬에게 주신 시에는 노자의 사상 혹은 노자적인 사상이 묘사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4. 무위를 귀하게 여기는 사상

 

  『전경』에는 확실하게 노자의 영향을 인정해도 좋을 구절도 나와 있습니다. 즉, ‘무위’의 존중인데, 상제께서는 ‘무위이화’를 언급하고 계십니다.
 「행록」 4장 52절에는「종도들이 걱정하는 일을 상제께 고하면 그 걱정은 항상 무위이화로 풀렸도다. 그러나 고한 뒤에 다시 걱정하면 상제께서 “내가 이미 알았으니 무슨 염려가 있느냐”고 종도들을 위로하셨도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제께서는 종도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면에서의 종교적 활동은 별도의 것으로 하고, 구체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종도들은 다시 걱정을 한 것이겠지요...
  ‘무위’는 노장사상의 근본입니다. 천지자연도, 그것을 기준으로 삼고 따르는 성인역시 무위입니다. 2장에는‘성인은 무위의 입장에 몸을 두고, 말에 의존하지 않는 교화를 행한다.’라고 되어 있고, 3장에 ‘무위에 의해 일을 처리해가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 37장에 ‘도는 언제라도 어떤 것도 하지 않고 있으나 모든 것을 하고 있다’, 43장에 ‘무언의 가르침과 무위의 이익, 세상에서 거기에 필적할 것은 거의 없다’, 57장에 ‘성인은 말한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백성은 저절로 잘 다스려진다.’등 중요한 곳마다, 종종 언급되고 있습니다.
  57장의 예,‘내가 무위하니 백성은 저절로 된다.’는 내용은 상제께서 말씀하신 ‘무위이화(無爲而化)’에 딱 대응하고 있습니다. 조금 생각해보면, 화(化)의 주체는 상제처럼 보이나, ‘무위’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화(化)의 행위를 할리는 없습니다. 이른바 천지자연의 되어가는 과정에 의해 상황이 변하는 것이 화(化)인 것입니다.
  ‘도는 무위로써 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말해져 왔습니다. 천지자연[道]은 의지가 없기 때문에 ‘무위’이지만, 그 활동은 우주전체에 퍼져나가므로 ‘하지 않음이 없다’가 되는 것입니다. ‘무위로써 하지 않음이 없다’라는 것은 천지자연의 활동 그 자체를 기술한 말입니다.
  「교법」 3장 27절에 보이는 상제의「나는 생ㆍ장ㆍ염ㆍ장(生長斂藏)의 사의(四義)를 쓰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無爲而化)니라」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천지자연[道]의 활동을 지칭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신의 활동도 거기에 딱 들어맞는다고 하는 의미겠지요.
 「예시」 73절의「신도(神道)로써 크고 작은 일을 다스리면 현묘 불측한 공이 이룩되나니 이것이 곧 무위화니라」라는 말씀도 천지자연[道]의 활동과 연관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신도(神道)」라고 하는 전문용어가 나오고 있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진리의 극한인 신명의 도’(『전경』일본어판의 주석)라고 하는 것은, 저에게는 천지자연의 도의 활동, 결국 천지자연의 섭리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거기에 ‘신명’을 인정하는 것은 종교가로서의 입장에 의한 것이겠지요.
  이 ‘무위이화’의 문언에 있어서는, 상제와 노자 사이에 통하는 이념이 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하고 생각합니다.


5. 부귀·강자·지혜자의 부정

 

  무위의 존중과도 관련됩니다만, 상제는 부귀(富貴)·강자(强者)·지혜자(智慧者)를 부정하는 사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점도 노자와 통합니다.
 「교법」 1장 24절에는, 「부귀한 자는 빈천을 즐기지 않으며 강한 자는 약한 것을 즐기지 않으며 지혜로운 자는 어리석음을 즐기지 않으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2장8절에도 「부귀한 자는 자만자족하여 그 명리를 돋우기에 마음을 쏟아 딴 생각을 머금지 아니하나니」, 3장 4절에는「부하고 귀하고 지혜롭고 강권을 가진 자는 모두 척에 걸려 콩나물 뽑히듯 하리니 묵은 기운이 채워 있는 곳에 큰 운수를 감당키 어려운 까닭이니라. 부자의 집 마루와 방과 곳간에는 살기와 재앙이 가득 차 있나니라」등의 말씀이 나옵니다.
  어째서 부귀·강자·지혜자를 배척하는 것일까에 대한 이유의 일단으로서「행록」 4장 48절에는 상제의「부자는 자신이 가진 재산만큼 그자에게 살기가 붙어있느니라. 만일 그런 자를 문하에 둔다면 먼저 그 살기를 제거하여 그 앞길을 맑게 해 주어야 할 터이니 그러자면 많은 시간이 낭비되고 공사에 막대한 지장이 오느니라. 그런 자 중에도 나를 알아보고 굳이 따르겠다는 지혜로운 자에게는 할 수 없이 허락할 뿐이니라.」라는 말씀이 보입니다.
  노자도 또한 부귀한 자나 강한 자, 지혜자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습니다. 무위자연의 도에서 보면, 이들은 인위의 극(極)이기 때문입니다. 9장에는 ‘부귀하고 교만하면 스스로 재난을 부른다.’라고 나오는데, 부귀를 배척하는 말은 노자의 본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검소하고 낮은 위치에 몸을 두는 것이 노자의 기본적 입장이었습니다.
  ‘강(强)’을 배척하는 사상은 유(柔)와의 대비를 하는 곳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또, 30장에는 ‘도에 근거하여 군주를 보좌하는 자는, 무력으로 천하에 강함을 드러내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지혜자나 지혜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노자의 기본자세입니다만, 이 지혜는 물론 세간적인 지혜입니다. 3장에는 ‘군주가 재능 있는 자를 존중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다투지 않게 된다. …언제나 백성을 무지무욕의 상태에 두고, 그 아는 체 하는 자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라 나와 있고, 10장에는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 지혜에 의존하지 않고 가능한가?’, 18장에는 ‘지혜가 작동하게 된 후로 커다란 허위가 행해지게 되었다’, 19장에는 ‘군주가 총명함과 지혜를 버려 버리면 백성의 복리는 백배가 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만, 요약하자면 노자는 무위자연의 입장에서, 상제는 살기나 척(慼)의 관점에서, 비슷한 주장에 이르렀던 것이겠지요.


6. 가난한 자·천한 자·약한 자·어리석은 자의 입장에 서다

 

  방금 앞 장에서 말한 것들과는 표리의 관계에 있는 항목들입니다. 상제께서는 가난한 자·천한 자·약한 자·어리석은 자들을 존중하셨습니다. 「교법」 1장 24절에는 상제의 「빈천하고 병들고 어리석은 자가 곧 나의 사람이니라.」 라는 말씀이 있고, 2장 8절에는「오직 빈궁한 자라야 제 신세를 제가 생각하여 도성덕립을 하루 속히 기다리며 운수가 조아들 때 마다 나를 생각하리니 그들이 내 사람이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2장11절에는 상제께서 종도들에게「후천에서는 약한 자가 도움을 얻으며 병든 자가 일어나며 천한 자가 높아지며 어리석은 자가 지혜를 얻을 것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보입니다. 3장 1절에는「나는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고 사람에게도 신명으로 하여금 가슴 속에 드나들게 하여 다 고쳐 쓰리라。 그러므로 나는 약하고 병들고 가난하고 천하고 어리석은 자를 쓰리니」라는 말씀이, 3장4절에는 종도들에게「오직 어리석고 가난하고 천하고 약한 것을 편이하여 마음과 입과 뜻으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죄를 조심하고 남에게 척을 짓지 말라」고 가르치시는 것이 보입니다. 상제의 생각에서는 가난한 자·천한 자·약한 자·어리석은 자, 등이야말로 순박하게 신명을 가슴 속에 통과시키고, 도와 덕의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사람의 마음에 대한 종교가로서의 깊은 통찰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노자 또한 가난한 자, 낮은 곳에 있는 자, 어리석음을 존중했습니다. 노자는, 사람은 낮은 곳에 있어야 한다, 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39장에 ‘귀한 자는 반드시 천한 자를 근본으로 하고, 지위가 높은 자는 낮은 자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고 나와 있는 것처럼, 그것이 만사의 근본·기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노자의 생각에서는, 왕이라는 것은 낮은 곳에 있는 대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78장에는 ‘이 세상 중에 물보다 부드럽고 연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굳세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는 물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물 본래의 성질을 바꾸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 그것은 세상사람 누구나 알고 있으나,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성인은《온 나라의 오탁(汚濁)을 자신이 떠맡는 자, 그를 국가의 군주라고 한다. 온 나라의 재액을 자신이 떠맡는 자, 그를 천하의 왕이라고 한다.》고 말했다’고 되어 있어, 유약한 물이 결국은 가장 강하다는 것으로부터, 그 성질을 왕에게 겹쳐 표현했던 것입니다.
  물을 찬양했던 문언으로는, 8장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노자는‘최상의 상태는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모든 사물에 혜택을 베풀면서도 우열을 겨루지 않고, 누구나가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떨어져 닿는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자의 사상은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상제도 노자도 가난하고 천한 자, 약하고 어리석은 자를 매우 존중했던 점은,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로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저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로 하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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