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께서 기유년(十五歲時) 四월 二十八일에 부친과 함께 고국을 떠나 이국땅인 만주에 가셨도다. (교운 2장 4절)
도주께서는 경술년에 어린 몸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에서 일본 군병과 말다툼을 하셨으며 이듬해 청조(淸朝) 말기에 조직된 보황당원(保皇黨員)이란 혐의를 받고 북경(北京)에 압송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엄친의 파란곡절의 생애에 가슴을 태우고 고국만이 아니라 동양 천지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구세제민의 큰 뜻을 가슴에 품고 입산 공부에 진력하셨도다. (교운 2장 5절)
『전경』의 교운 2장 4절과 5절은 도주님께서 이국땅인 만주로 가셨으며, 또 그곳에서 입산 공부를 하셨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주님께서 가셨던 곳은 만주의 어디인가? 그리고 구세제민을 위해 입산 공부를 하신 곳은 또 어디인가? 이번 답사에서는 이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한다.
도주님께서 입산 공부하셨던 곳에 대해 살펴보자. 도주님 친족들에 따르면, 그 공부처는 노고산 안에 있었다고 한다. 집안의 장남인 까닭으로 1911년경에 배필을 맞이하여 혼인을 하셨고, 또한 집안의 대소사와 입산 공부 시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 때문이라도 도주님께서는 공부를 하시다가도 틈틈이 하산하여 집에 내왕하시거나, 가족들이 도주님께 간혹 가셨을 가능성이 매우 큰데, 이로 미루어보면 도주님께서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느 조용한 산 속에서 공부를 하신 것으로 짐작된다.
일설에는 노고산에 관성제군을 모신 관왕묘(關王廟)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그 당시의 만주지역 종교 문화로 볼 때 독립적으로 관왕묘만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렵기에 관왕묘와 관련된 주장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당시에는 신령스러운 산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도교 사원인 도관(道觀)이 존재했고 이 도관 내에는 대부분 관성제군을 모신 사당이 있었으므로, 노고산의 관왕묘와 관련된 이야기는 도주님이 입산 공부하신 산에도 도관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참고 자료로만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노고산(老姑山) 역시 글자 그대로는 확인이 되지 않는 지명이다. 따라서 ‘수둔구’, ‘수툰거우’와 마찬가지로 노고산 역시 그와 비슷하게 발음되는 산을 찾아야 한다. 현지인들에 따르면, 유하현에는 노고산(老姑山: 라오구샨)은 없지만 동일한 발음인 ‘라오구샨’[老孤山]으로 불리기도 하는 산이 있으니, 그것은 고산자진(孤山子镇)의 대고산이다.
이 산의 원래 이름은 대고산(大孤山) 또는 고산(孤山)이다. 너른 평야 한 가운데 외로이 서있는 산이라고 하여 붙은 이름인데, 부근의 작은 산이 소고산(小孤山), 조금 큰 산이 대고산(大孤山)이다. 중국에서 대(大)와 노(老)는 서로 뜻이 통하는 말이기에 현지 중국인들은 이 산을 노고산(老孤山)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고(孤)와 고(姑)는 발음이 같아서 이름만 놓고 보면 노고산(老姑山)은 이 산일 가능성이 있다. 또 과거 이 산에는 도관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 옥수수 밭으로 변해버렸지만, 그래도 이 산에 도관이 있었다는 사실은 공부처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그러나 이 산을 도주님의 입산 공부처로 보기에는 무언가 석연찮은 점이 있다. 고산자진에는 수둔구나 수툰거우와 유사한 지명이 전혀 없고, 그 산이 인구가 밀집한 고산자진의 한 중심에 있다는 것 때문이다. 유하현의 중부에 위치한 고산자진은, 그 당시에 9개 현과 5개 성이 교역하는 길목이라고 할 정도의 교통 요충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내왕이 잦고 복잡한 곳이었다. 그래서 도주님께서 계시던 때인 1910년대에는 심양(당시에는 봉천이었다)에 버금갈 정도로 번화한 곳이라고 하여 소봉천(小奉天)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최근에도 장날마다 1만여 명이 모일 정도로 인구가 밀집되는 곳인데, <그림 22>에서 보듯이 바로 이 번화가 한복판에 있는 산이 대고산 즉 노고산이다. 지금은 인구가 많이 줄어들어 가옥들이 드문드문 있으나, 당시에는 이 노고산을 중심으로 하여 사람들이 밀집하여 살고 있었다. 따라서 도주님께서 인구 밀집 지역인 이 곳까지 오셔서 사방이 사람으로 들끓는 작은 야산에서 공부를 하셨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유하현 남쪽의 삼원포(三源浦) 서쪽의 대고산(大孤山) 또한 고산자의 대고산과 명칭이 동일하기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원포도 교통의 요충지로서 고산자진과 더불어 사람들의 내왕이 잦은 곳이다. 여기에도 평야 가운데 두 개의 산이 외롭게 서 있으니, 큰 산이 대고산이고 작은 산이 소고산으로서 고산자진의 소고산, 대고산과 동일하다. 그래서 이 지역을 상고산자(上孤山子)라고도 했다. 고산자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대고산(大孤山)을 노고산(老孤山)으로 부르기도 했다는 주장도 간혹 있지만, 대다수의 현지 지역민들은 이곳을 노고산으로 부른 적이 없다고 증언한다. 또 이 대고산에는 도관이 존재했던 적이 없으며, 1960년대 이후에 산 서남쪽에 채석장이 개발되자 그곳에 안전을 기원하는 작은 제단이 하나 마련되었고 채석장의 기능이 다한 지금은 소멸되었다고 한다.
이곳 역시 도주님의 공부처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신흥강습소 때문이다. 당시 만주에는 일제에 항거하는 단체들이 많았는데, 그 대표적인 것들이 신흥강습소와 신흥무관학교,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서로군정서, 서전서숙, 명동서숙과 명동학교,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등이었다. 이 중 신흥강습소가 세워졌던 곳이 바로 삼원포의 대고산 밑이었다. 삼원포는 망명해 온 한국인들의 수가 제법 많은 곳이었는데, 이상룡과 이회영 등이 1911년 4월에 유하현 삼원포로 이주해 와서 토지 개간과 민생문제,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경학사를 결성하고 대고산 아래에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신흥강습소는 일제의 눈을 피하고 중국 당국의 양해를 얻기 위해 강습소(講習所) 즉 학문을 익히는 곳이라는 뜻의 간판을 내다걸었지만, 실제로는 무장투쟁을 하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1911년 가을에 경학사는 해체되었지만 신흥강습소는 꾸준히 존속하였고, 1913년 5월에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로 이전되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그 명칭이 바뀌게 된다. 이 학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1920년 8월에 폐교되었으나, 그때까지 배출된 약 3500여 명의 졸업생들은 홍범도의 대한의용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섰다.
이상룡, 이회영 등이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창설할 때 눈에 띄는 사실은, 이들이 1911년 4월에 삼원포의 대고산에서 노천대회를 열었고, 한 달 후에 그 대고산 아랫마을인 추지가(鄒之街: 지금의 鄒家村) 토착민들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신흥강습소를 세웠으며, 그때부터 1913년 봄까지 만 2년간에 걸쳐 신흥강습소에서 항일을 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신흥강습소 바로 옆에 위치한 작고 아담한 대고산도 군사훈련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신흥강습소가 1911년 봄에서 1913년 봄까지 만 2년간 실시한 군사훈련 기간은 도주님께서 이미 입산 공부에 들어가셨던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도주님께서 언제부터 입산 공부를 시작하셨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경술(1910)년 이듬해인 1911년에 도주님 부친께서 보황당원의 혐의로29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후에 구세제민의 큰 뜻을 품고 입산 공부를 시작하셨다는 교운 2장 5절의 기록을 참조한다면, 아마도 1911년 또는 1912년부터가 입산 공부를 시작하신 때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특히 도주님께서 유하현에 정착하신 그 다음 해인 1910년 겨울에 유하현에 흑사병이 돌아 사람들이 많이 죽었고, 1911년에도 역시 흑사병이 돌아 사람들이 많이 죽었으며, 1911년 한여름에는 눈비가 내리고 기온이 급강하하는 기상이변까지 일어났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의 침략으로 동양의 평화가 크게 위협받는 정치적 불안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과 자연재해까지 겹쳐 사람들에게 막대한 고통을 안겨다주고 있었던 상황은, 도주님께서 도력(道力)으로 구국제세하실 뜻을 더욱 굳히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삼원포의 대고산을 도주님의 입산 공부처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주변에도 수둔구, 수툰거우와 유사한 지명이 전혀 없어 공부처였을 가능성이 희박하기도 하지만, 이 아담한 산 자체가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 아니라 노천대회를 열고 사람들이 종종 모이고 들락날락하는 열린 공간이었던 데다가, 무엇보다 군사훈련을 하는 강습소 바로 옆이었기에, 여기에서 공부를 하셨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주님의 봉천명 3」, ≪대순회보≫ 176 (2015)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