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박도원은 중국 저장성 항저우시 시호 북쪽 대안의 거링에 있는 도가의 사원이며 晉나라 때의 도사 갈홍(葛洪)을 기리기 위해 당나라때 건립된 사원이다.
상해 성황묘는 명나라 영락 연간에 세워졌으며 성황신인 진유백(秦裕伯)을 모시고 있다. 원나라 말 명나라 초기의 유명인사 진유백(秦裕伯)는 당시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그 당시 작은 마을이었던 상하이[上海]로 내려와 살았다. 그러나 명나라 때 주원장(朱元璋)의 간곡한 부탁을 여러 차례 거절하다가 결국 못 이기고 다시 정치에 나섰다. 진유백이 죽자 주원장은 그를 상하이 “성황의 신”으로 봉하였다. 명절 때가 되면 사람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이곳에서 향을 피우며 소원을 빈다.
우리 일행은 다른 참석자들과 함께 25~28일에 항주(杭州)와 상해(上海)로 도교사원 탐방에 나섰다. 2시간 넘게 비행기로 이동하여 항주에서 제일 먼저 들린 도교사원은 ‘포박도원(抱朴道院)’이다. 이곳은 절강성(浙江省) 항주시(杭州市) 서호(西湖) 북쪽 대안의 걸령(葛嶺)에 있는 것으로 진(晉)나라 때의 도사 갈홍(葛洪)을 기리기 위해 당나라 때 건립되었다. 처음의 명칭은 ‘갈선사(葛仙祠)’였으나 원나라 때 전란으로 모두 훼손된 것을 명나라 때 복구한 뒤 ‘마노산거(瑪瑙山居)’로 개칭하였다. 청나라 때 다시 여러 차례 복구 및 증축 공사를 거쳐 갈홍의 호인 포박자(抱朴子)를 따서 ‘포박도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갈홍은 연단술(煉丹術)과 의학을 연구하여 신선이 되는 방법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던 인물로 서호의 민간에는 그에 관한 설화가 많다. 포박도원 입구에서 조금 오르다 보면 갈홍이 수행했던 곳을 볼 수 있는데, 그곳을 바라보자니 바람에 흔들리는 푸른 나뭇잎 소리와 산새 소리에 더욱 신비롭게 느껴져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주요 건축물은 갈선전(葛仙殿)·홍매각(紅梅閣)·포박려(抱朴廬)·반한당(半閑堂) 등이 있다. 정전(正殿)인 갈선전은 지붕의 처마가 두 겹이고, 경사 진 목조 건물로 갈홍을 비롯하여 여동빈(呂洞賓)과 자항진인(慈航眞人)의 신상이 모셔져 있었다. 산문 양쪽으로 끝없이 노란색 담장이 산세에 따라 구불구불하게 펼쳐져 있었는데 마치 한 마리의 용을 연상케 하였다. 이름 또한 용장(龍牆: 용의 담장)이라고 한다. 일행은 모두 홍매각 2층 접견실에서 사원의 주지와 60년간 도교협회 회장과 주지를 했던 분을 만나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곳에 갈홍의 수행처가 있으므로 충분히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포박도원 주지의 안내로 옥황산(玉皇山) 복성관(福星觀)에 잠시 들렀다. 옥황산은 원래 용산이었고 그 후에 ‘육왕산’, 복성관을 만들어 옥황상제를 공양한 이후로는 ‘옥황산’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각 신전의 기둥을 보면 용이 조각되어 있는데, 어떤 곳은 발톱이 5개이고, 어떤 곳은 4개였다. 발톱이 5개인 용은 승천을 할 수 있고, 4개인 경우는 아직 승천할 수 없는 용을 뜻하는 것으로 높은 신이 모셔진 곳에 용 발톱이 5개 있는 것이라 하였다. 과연 옥황상제를 모신 영소보전(靈霄寶殿)에는 용의 발톱이 5개, 복록재신을 모신 재신전(財神殿)에는 용의 발톱이 4개였다.
다음 날인 27일에 들린 동백관(桐栢觀)은 재건축을 하고 있었다. 젊은 도사의 안내로 동백관을 들러 잠시 설명을 들은 후 서둘러 오학관(嗚鶴觀)으로 향하였다. 오학관은 동백관과 달리 오래된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의 주지를 통해 도교 남종 수행의 필요성과 기술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을 닦아 수행하는 성명쌍수(性命雙修)를 기본으로 하므로 몸이 건강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육체의 생명을 연장하는 수련법을 익히는데, 이 수련법을 익힌 사람은 평균 120세를 넘고, 그중에 제일 연장자가 160세였다고 하였다. 영상으로 잠시 보여준 수련법은 마치 춤을 추는 듯하였다. 일행 중에 정기신(精氣神)이 열리는 때를 물었는데, 알려 줄 수 없다고 하며 알기 위해서는 스승의 지도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경전의 비결을 알아야 하며 부지런히 수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도교 남종의 수행법에 대한 설명을 마친 후 항주에서 마지막으로 천태산(天台山) 기슭에 있는 국청사(國淸寺)에 들렀다. 이곳은 수(隋)나라 고조(高祖) 때인 598년에 창건된 이래 여러 차례의 성쇠를 겪었다. 면적은 1만 9,600㎡이며, 4개의 전(殿)과 5개의 루(樓), 2개의 정(亭), 1개의 실(室)에 모두 600여 칸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淸)나라 옹정제(雍正帝) 때인 1734년에 주요 건축물이 복구되었고, 그 이후에도 증축되었다. 사찰 뒤로 우뚝 솟은 5개의 산봉우리와 앞쪽에 흐르는 계곡이 웅장한 건축물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사찰 앞에 국청사탑이 있다는데 미처 보질 못하고 주지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왼쪽에는 수령 1,300년이 넘은 매화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천태종 5대조가 손수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고승(高僧)을 많이 배출한 사찰로도 유명하며, 또 천태종(天台宗)이 성립된 곳으로서 804년 일본 승려 사이초[最澄]가 이 사찰에서 유학하고 『법화경(法華經)』 345권을 얻어 귀국한 뒤 일본 천태종을 열었다. 이 때문에 일본 천태종은 국청사를 ‘조정(祖庭)’이라 부른다고 한다. 고려 때 의천(義天)대사가 바로 이곳에서 법을 구하고 귀국하여 천태종을 전래하였으므로 한국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오래된 역사를 지닌 곳인 만큼 세월의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항주에서 출발하여 5시간 동안 버스에 몸을 맡긴 채 도착한 곳은 중국 양자강(揚子江) 하구에 있는 중국 최대 도시인 상해였다. 상해의 멋진 야경을 감상한 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다음날(28일) 귀국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들릴 도교사원인 성황묘(城隍廟)로 향하였다. 성황묘는 상하이 구도시의 오래된 도교 사원으로 명나라 때 만들어졌으며 최근 2006년에 복원되었다. 황포구(黄浦區) 남부 예원 맞은편에 위치하며, 원래는 금산신사라는 절이었는데, 1403년 명조 영락제 연간에 성황사로 개명되었다. 그래서 성황신이 아닌 금산신이 앞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신은 곳곳에 많이 있으나 모셔지는 경우가 조금씩 다르다고 하였다. 대부분 그 지역 유명 인사나 마을을 위해 공헌한 사람을 성황신으로 모시는데 상해의 성황신은 진유백(秦裕伯)을 모시고 있다. 원나라 말에서 명나라 초기의 유명인사인 진유백은 당시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작은 마을이었던 상해로 내려와 살았다. 그러나 명나라 때 주원장(朱元璋)의 간곡한 부탁으로 거절 못 하고 다시 정치에 나섰으며, 진유백이 죽자 주원장이 그를 상해의 ‘성황신’으로 봉하였다고 한다. 명절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이곳에서 향을 피우며 소원을 빈다고 하는데, 평소에도 나이와 성별 구분 없이 정성스레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보통 하루에 10만 명 정도의 신도들이 오는데, 많을 때는 19만 명 정도가 왔다고 한다.
이렇게 총 4곳의 도교사원을 다니면서 느낀 것은 중국의 도교가 점점 발달하고는 있지만 종교의 순수한 목적보다는 영리적인 목적으로 발달하여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이 아닌가 싶다. 중국은 원래 불교, 도교, 이슬람교, 크리스트교, 조로아스터교 등의 종교를 믿었으나 1949년 사회주의 정권 성립 이후 종교 활동이 크게 억제되었고 1966년 문화대혁명 때는 사찰과 사원이 크게 훼손되었다. 국청사의 경우는 정부에서 스님들을 강제로 결혼시켜 농민으로 전락시키는 등 종교적 탄압이 심하였다고 한다. 1978년 개방 이후 전통적인 풍속과 종교가 서서히 회복되어 지금은 여기저기서 사원과 사찰을 복원 또는 새로 짓고 있다.
성황묘도 그렇고 대부분의 도교사원 주지들은 여러 개의 사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성황묘에서는 문화대혁명 전에 종교 활동이 어려워지자 귀금속을 팔았는데, 많은 신도들이 좋은 운을 준다고 믿고 귀금속을 사는 덕분에 장사가 잘되었다고 한다. 1994년 개관이 된 이후에는 귀금속을 팔지 않고, 도사들의 인재양성과 자선사업에 노력하며 도교 발전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자 노력한다고 하였다.
이번 도교사원 탐방을 통해 복원되거나 새로 짓고 있는 사원들을 볼 수 있었는데, 외형의 발전도 좋지만 무엇보다 젊은 인재를 양성하고 전통과 역사에 대해 연구하고자 노력한다면 도교가 급속히 발전하리라 본다. 아무리 웅장하고 아름다운 사원이라 할지라도 내세울 만한 역사가 없고 전통이 없다면 일반 예술 전시관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번 학회는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하는 도교의 다양한 양생법과 각 나라의 수행 목적 및 방법을 알 수 있는 뜻깊은 자리였다. 또 답사를 통해서 문헌상으로 볼 수 없었던 도교의 수행 방법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거기다 도교 사원 주지로부터 현재 중국 도교의 상황 설명을 듣고 도교라는 종교를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개인적으로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양생법을 익혀 신선이 되고자 하는 중국 도교와 도통을 목적으로 수행하여 도통군자가 되려 하는 대순진리회의 유사점에 대해 더욱 연구하고 싶어졌다. 이에 앞서 대순진리회 발전을 위해 학교 교육과 교리 연구에 적극적으로 지지하셨던 도전님의 뜻에 따라 교리 연구를 활발히 하여 대순진리회를 알리고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자리가 자주 마련되었으면 한다.
교무부 답사기: 신상미, 「제4회 공아시아 도문화 국제학술대회를 다녀와서」, ≪대순회보≫ 150 (2013)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