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관련 글 : 「대순진리회의 성지 바로보기」, 대순회보 83호(2008);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23: 시루산에서 공부하심」, 대순회보 87호(2008);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24: 모악산 대원사로 가시다」, 대순회보 88호(2008);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25: 천지대도를 여시다」, 대순회보 89호(2008);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30: 김형렬이 진묵과 율곡 이야기를 아뢰다」, 대순회보 94호(2009)
상제님께서는 이치안의 집에 오래 머무시지 않으시고 곧 모악산(母岳山) 대원사(大院寺)로 떠나셨다. 모악산은 상제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30년간 임어하셨던 금산사(金山寺)가 있는 곳이다. 모악산의 정상은 국사봉이고, 이 봉의 서쪽 기슭에는 금산사가, 동쪽 기슭에는 대원사가 자리하고 있다. 대원사는 신라시대에 세워진 고찰(古刹)로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1606년(선조 39) 진묵대사가 중창하여 수도 장소로 삼았던 곳이다. 그후 쇠락하였으나 1886년(고종 23)에 금곡(錦谷)대사가 새로 와서 대웅전과 명부전을 새로 지었다.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19) : 상제님의 주유천하 1
(1) 김일부와 만나심
주유천하(周遊天下)를 위해 김제 내주동을 떠나신 상제님께서는 이리(裡里)를 거쳐 다음 날 충남 향적산(香積山, 574m)에서 김일부(金一夫, 1826~1898)를 만나셨다. 김일부는 정역(正易)을 창시한 인물로 영가무도(詠歌舞蹈)의 교법을 펼치고 있던 중이었다.
‘영가무도’란 음·아·어·이·오의 다섯 가지 소리로 구성된 오음주(五音呪)를 송주(誦呪)하며 춤을 추는 수련법이다. 이 다섯 개의 모음을 노래 곡조와 같이 크게 소리 내어 부르는데 계속해서 외우면 손발이 저절로 움직여 춤이 나오게 된다고 한다. 이때 부르는 노래를 영가(詠歌)라 하고 자동적으로 나오는 춤을 무도(舞蹈)라 부른다.
상제님의 방문이 있기 직전에 김일부는 신이(神異)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그는 꿈에 천존(天尊)의 명을 받들어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자(使者)를 따라 상제님과 더불어 옥경(玉京)에 올라갔던 것이다. 사자는 높이 솟은 주루금궐(珠樓禁闕) 요운전(曜雲殿)에 상제님과 김일부를 안내하였다. 그랬더니 천존께서 상제님께 광구천하(匡救天下)하시려는 뜻을 상찬(賞讚)04하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꿈을 꾸고 어리둥절해 있던 김일부는 돌연 상제님의 방문을 맞이하게 되었다.
상제님을 알아본 그는 반가이 맞아들이면서 신인(神人)이라 하여 공경하였다. 그리고 요운(曜雲)이라는 호도 지어 올렸으나 상제님께서 이 호를 쓰신 적은 없으셨다.
김일부는 훗날 상제님께서 명부공사(冥府工事)를 처결하실 때 청국(淸國) 명부(冥府)를 관장하도록 명을 받든 인물이다.따라서 김일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 여겨져 여기에 잠시 지면을 할애해 보고자 한다.
김일부는 본관이 광산(光山)이고 이름은 항(恒), 초명은 재일(在一)이었다. 부친은 김인로(金麟魯), 모친은 대구 서씨(徐氏)이며 1826년에 충남 논산 당골(침골 혹은 沈洞이라고도 함)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현재 당골 뒤쪽에는 수백 평의 대나무 밭이 있는데, 여기가 김일부가 태어난 생가가 있던 곳이다.
그는 조선 전기의 뛰어난 문신 김국광(金國光, 1415~1480)07의 후예였으나, 집안은 이미 몰락하여 무척 가난하였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학문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평생 책을 끼고 살았다. 김일부는 키가 컸으며 용모도 비범하였고, 특히 상체가 길어 팔을 드리우면 무릎을 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