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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국안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봉준
상제님께서는 “동학농민운동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으니 결국 이는 후천의 일을 말한 것”이라고 하시며, “전봉준이 순창 농암에 묻혀있는 큰 기운을 쓸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동학이 성공하지 못하였다.”고 일러주셨다. 즉 동학농민운동이 나라를 위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을 이루고자 일어난 운동이었고, 이는 후천의 이상을 말함이니 그 뜻은 옳은 것이었으나 전봉준이 큰 기운을 쓸 수 없어 결국 실패하였다고 하신 듯하다.
그러나 상제님께서 전봉준을 결코 낮게 평가하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백의 한사로 일어나 천하를 움직인 만고의 명장(名將)이 바로 전봉준’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상제님께서 전봉준을 높이 평가하신 이유는 바로 그가 가진 마음 때문이었다.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상제님의 평가
불과 110여 년 전, 조선뿐 아니라 천하에 큰 난까지 동하게 만들었던 동학농민운동! 이 운동의 목적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이었다. 그런데 상제님께서는 전봉준과 같이 그렇게 애쓴 사람도 있었으나 이 운동에 편승하여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려는 자들도 많았다는 것을 지적하셨다.
보국안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봉준
상제님께서는 “동학농민운동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으니 결국 이는 후천의 일을 말한 것”이라고 하시며, “전봉준이 순창 농암에 묻혀있는 큰 기운을 쓸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동학이 성공하지 못하였다.”고 일러주셨다. 즉 동학농민운동이 나라를 위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을 이루고자 일어난 운동이었고, 이는 후천의 이상을 말함이니 그 뜻은 옳은 것이었으나 전봉준이 큰 기운을 쓸 수 없어 결국 실패하였다고 하신 듯하다.
그러나 상제님께서 전봉준을 결코 낮게 평가하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백의 한사로 일어나 천하를 움직인 만고의 명장(名將)이 바로 전봉준’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상제님께서 전봉준을 높이 평가하신 이유는 바로 그가 가진 마음 때문이었다.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라. 남이 잘 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되나니 전명숙(전봉준을 말함)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느니라.”(교법 1장 2절)
상제님의 이런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전봉준은 자신의 영달(榮達)을 위해 산 사람이 아니라 억압받던 천인들을 위해 살다 간 사람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난 뒤 사로잡힌 전봉준이 심문받는 과정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악하고 간사한 관리를 쫓아버려 임금의 곁을 깨끗이 한 후, 몇 사람의 명망있는 선비들을 옹립해서 정치를 하게 하고 우리 동학군들은 바로 시골로 돌아가 농사에 종사할 생각이었다.”라고 말한 것은 그의 진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난을 일으킨 주범’이라는 오명을 덮어쓴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다. 그는 죽음 직전에 “나는 바른 길을 걷고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반역죄를 적용한다면 천고(千古)에 유감이다.”라는 말과 함께 다음의 시(詩)를 남겼다.
時來天地皆同力 때가 와서 천하가 모두 힘을 같이 했으나
運去英雄不自謀 운이 다하면 영웅도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도다.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는 정의일 뿐 나에게는 잘못이 없나니
爲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아는 이 어디 있을까
이런 전봉준이었기에 상제님께서는 사명기(司命旗)를 세워주심으로써 원()도 풀어주시고, 조선의 명부를 관장하는 직책까지도 내려주셨던 것이다.
왕후장상을 꿈꾸다 - 도솔암 마애불 사건
한편 상제님께서는 “본래 동학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음은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라.”(공사 2장 19절)고 하시며, 이들의 해원을 위한 공사도 보신 적이 있다. 바로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이 ‘보국안민’이라는 기치 아래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적지 않은 숫자가 속마음으로는 제각각 저마다의 욕심 즉 왕후장상을 꿈꾸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이런 정황을 확인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시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최고 지도자는 총대장 전봉준을 비롯하여 2명의 총관령 손화중(孫華仲, 1861~1895)과 김개남(金開南, 1853~1895)이었다.
우선 손화중은 22세의 나이에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 지리산 청학동에 들어갔다가 동학에 입교하였고, 전북 무장(茂長)에서 동학의 포교에 힘써 제법 많은 신도를 모은 인물이었다. 당시 그 주변 일대에는 선운사 도솔암에 있는 마애불에 얽힌 참언(讖言)이 떠돌고 있었다. 그것은 마애불의 형상이 검단대사(黔丹大師)의 모습이며, 그 석불 명치 부분의 감실(龕室: 성스러운 물건을 넣어둔 곳)에 검단대사가 감춘 신기한 비결이 들어있고, 오직 새 세상의 주인이 아니면 아무도 이 비결을 열어볼 수 없으며, 이 비결이 나오면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왕조의 나라가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옛날 전라감사였던 이서구(李書九, 1754~1825)도 이 비결을 꺼내려고 하다가 뇌성벽력이 일어나 비결을 다 보지 못하고 다만 ‘李書九 開坼(이서구가 꺼내 열어본다)’이라는 글자만 확인하고 다시 넣어두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참언은 더욱 신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892년, 손화중과 그 수하들은 한밤중에 선운사를 습격하여 수십 명의 중들을 포박하여 놓고 마애불의 명치에 있는 감실을 도끼로 부순 뒤 비결서를 꺼내 훔쳐가 버렸다. 날이 밝자 중들은 이 사실을 즉시 관아에 고발하였다. 수백 명의 동학신도들이 잡혀 취초를 당하고 그중 3명은 역적죄로 사형까지 당하였으나 손화중을 비롯한 간부급들은 모두 도망하여 화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 마애불 감실에서 꺼냈다는 비결서는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11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까지도 그 비결을 직접 봤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 비결서가 과연 진짜였는지 의심이 가는 대목인데, 일설에는 그 비결서가 정약용의 『목민심서』였을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손화중이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의 감실에서 비결서를 꺼낸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떠나 당시 그 일대에는 그런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당연히 부패한 조선왕조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주인은 손화중일 것이라는 믿음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이로 인해 손화중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비결서 사건 후 2년 뒤 손화중은 동학농민운동에서 대표 지도자로 활약하는데, 그때의 손화중의 행동을 분석해보면 그 자신이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되고자 노력했던 흔적을 찾기 어렵다. 따라서 손화중 본인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자 하는 욕심이 없었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새로운 나라가 수립되는데 참여함으로써, 개국공신으로 높은 작위를 받으려는 마음을 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