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관련 글 : 「현대사회와 무속의례-해원상생굿의 출현과 그 의미를 중심으로」, 종교연구 72 (2013)
해원상생굿이 정신대문제와 같이 가해자들이 귀를 막고 있는 경우보다는, 송현동이 지적한 통합과 분열이 교차하는 미묘한 역사적 사건에 적용될 때 더욱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를 테면 제주 4⋅3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통합 위령제에서 한 유족이 ‘죽인 놈과 죽은 놈을 같은 제상에서 제사지내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고 울분을 토해내는 장면, 또한 5⋅18민주화운동의 경우 진압군과 민간인 희생자들을 모두 동일하게 추모하는 모순적인 원혼의례를 떠올려본다면, 이런 경우의 원혼의례를 해원상생굿의 형식으로 진행했을 때 그 분열과 갈등을 봉합하는 데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해원상생굿은 피해자들의 입장에 치우쳐있는 것일 뿐(4⋅3해원상생굿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형태의 해원상생굿은 아직 연행되고 있지 않다는 아쉬움이 있다.
현대사회와 무속의례(결론 中)
비록 한국 종교지형에서 증산을 신앙하는 교단들이 소수라고 하더라도, 요즘 항간에서 ‘상생’이라는 용어를 심심치 않게 쓰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증산의 종교사상은 한국 사회에 일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채희완이 해원상생굿을 만들어낸 이후로 해원상생을 슬로건으로 하는 사회극이 조금씩 퍼져나감에 따라 그러한 현상은 심화되었다. 근대 이후 무속은 주술적인 성격으로 인해 미신에 불과하다는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지만, 무속의 핵심의례인 굿은 민주진영의 초청을 받아들여 종합예술로서의 사회극으로 적극적인 자기 변신을 꾀하고 역사적⋅정치적⋅사회적으로 첨예한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새로운 활력을 찾게 되었다. 이것은 굿이 세속의례로 그 모습을 바꾼 ‘1차 변용’이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세속의례로서의 사회적 굿은 저항담론에 편향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다. 그 지점에서 민주진영이 피로해진 항쟁 방식에 새로운 변화를 주기 위해 증산의 종교사상인 해원상생으로 외피를 꾸미는 개선책을 내어놓았으니, 그 형식이나 내용에서는 일정한 제한이 있다고 할지라도 저항담론에서 탈피하여 사회통합을 지향하는 것으로 굿은 그 아이덴티티를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굿의 ‘2차 변용’이라 할 만하다. 굿은 현대사회에 적응하기위해 두 차례에 걸친 변용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고, 현대사회 역시 사회적 굿으로부터 일정한 변동을 요청받고 또 내재되었던 갈등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현대 한국에서 사회와 무속은 서로 영향을 끼쳐왔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사회적 굿에 종교사상을 덧씌운 형태인 현재의 해원상생굿은 민주진영에서 항쟁방식을 효과적으로 바꾸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을 뿐, 증산의 해원상생사상 자체를 치밀하게 끌어들인 것은 아니다. 증산의 해원상생사상을 사회적 굿에 접목시키는 데에는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증산에 따르면 개벽 직전까지는 삼라만상 모두가 스스로 품은 뜻대로 해원을 하는 시대이다. 우주 자체의 흐름은 해원상생이라는 도수에 따라 운행되지만, 우주에 속한 각 개체들은 그러한 운행에 동참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해원시대를 맞아 우주는 점차 상생의 길로 나아가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상생의 길 대신 분풀이나 복수 또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일을 벌이는 부정적인 해원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다. 물론 그런 경우에 세상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증산은 조만간에 세상이 그런 증상을 보일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부정적인 해원방법을 선택했을 경우 종국에는 결과가 좋지 못할 것임을 경고했다. 그가 가르친 해원시대의 해원방법은 종교적으로 승화된 긍정적인 것이었다. 즉 그 해원방법은 상생을 추구하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니, 구체적으로는 악을 오히려 선으로 갚아주며, 천한 사람을 우대해주고, 덕을 닦으며 사람을 올바르게 대우하고, 남을 잘 되게 하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해원상생을 실천하지 못하는 존재들의 장래는 대단히 불행할 것이라는 것이 증산의 메시지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해원상생이 종말(개벽)과 구원론, 그리고 신정론(神正論)에 바탕한 사상이라는 사실이다. 민주진영에서 추진하는 사회적 굿이 이러한 종교적 내용까지 포함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해원상생굿 역시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가해자들의 반성 모르는 작태에 대해서, 증산의 해원상생사상은 개벽과 구원의 입장에서 그들의 불행한 미래를 경고라도 하지만, 해원상생굿은 피해자들의 위무에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물론 그것도 의미는 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해원상생굿이 정신대문제와 같이 가해자들이 귀를 막고 있는 경우보다는, 송현동이 지적한 통합과 분열이 교차하는 미묘한 역사적 사건에 적용될 때 더욱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를 테면 제주 4⋅3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통합 위령제에서 한 유족이 ‘죽인 놈과 죽은 놈을 같은 제상에서 제사지내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고 울분을 토해내는 장면, 또한 5⋅18민주화운동의 경우 진압군과 민간인 희생자들을 모두 동일하게 추모하는 모순적인 원혼의례를 떠올려본다면, 이런 경우의 원혼의례를 해원상생굿의 형식으로 진행했을 때 그 분열과 갈등을 봉합하는 데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해원상생굿은 피해자들의 입장에 치우쳐있는 것일 뿐(4⋅3해원상생굿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형태의 해원상생굿은 아직 연행되고 있지 않다는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