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관련 글 :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44: 진묵의 초혼」, 대순회보 108호(2010);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47: 최익현과 일심」, 대순회보 111호(2010);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48: 신명의 박대가 심한 서교의 앞날」, 대순회보 112호(2010)
윤 4월 23일,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최익현과 임병찬은 의병을 일으킨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순창에서 체포되었고, 이들은 모두 서울로 압송되었다. 상제님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시고, “일심(一心)의 힘이 크니라. 같은 탄알 밑에서 정낙언은 죽고 최면암(최익현)은 살았느니라. 이것은 일심의 힘으로 인함이니라. 일심을 가진 자는 한 손가락을 튕겨도 능히 만 리 밖에 있는 군함을 물리치리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그러시면서 상제님께서는 “글 읽던 최익현이 의기를 떨쳐 칼과 창을 쥐었지만, 10월 대마도에서 널에 얹혀 있다가 흔들흔들 고국 산하에 돌아오도다(讀書崔益鉉 義氣束劒戟 十月對馬島 曳曳山河 )”라고 그의 만장(輓章)을 지으셨다. 만장이란 죽은 사람을 애도하며 짓는 글이니 상제님께서는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죽을 것임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최익현과 일심
그 무렵 만경 일대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1905[乙巳]년 말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당시 74세의 고령이었던 유생들의 거두(巨頭)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항일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의병을 모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익현은 의병을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의 제자 고석진(高石鎭)이 “태인 사람 임병찬(林炳瓚, 1851~1916)은 충의가 뛰어나니 함께 의논해 보시라”고 하면서 임병찬을 천거하였다. 임병찬은 낙안(樂安) 군수를 지낸 인물로 태인에서는 꽤 명망이 있는 인물이었다. 최익현의 명성을 알고 있던 임병찬은 그를 만나 뜻을 같이 하기로 하고 사람을 모아 윤 4월 13일에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궐기하였으니, 이때 모인 의병의 수는 300명에 달했다. 이들은 다음날에 정읍을 무혈점령하고 윤 4월 16일에는 순창에 입성하였다. 이때는 모를 심어야 할 시기였지만 가뭄이 오래 계속되어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대거 의병에 합류하니, 윤 4월 17일에는 의병의 수가 900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총을 가진 사람들은 200명에 불과해 실제 전력은 매우 약한 상태였다. 나라를 위한 마음으로 모이기는 하였지만 이 의병들의 미래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본 어떤 사람이 최익현에게 이 거사가 과연 성공할 수 있겠는지 물었다. 그러자 최익현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또한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국가에서 500년 동안 선비를 길렀는데, 적을 쳐서 나라를 다시 찾으려는 대의를 세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이것 또한 수치가 아니겠느냐? 내 비록 나이가 팔십에 가까우나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다할 뿐, 죽고 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최익현의 뜻은 매우 훌륭하였지만, 10년 전 동학농민운동 때 전봉준 이하 수많은 목숨이 사라져 갔듯 이제 또 많은 사람들의 목숨은 풍전등화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며칠간 계속 만경에 머물고 계시던 상제님께서는 가뭄 든 논이 해갈되도록 비를 충분히 내리게 하셨다. 이제 모를 심을 수 있게 되자 의병에 가담하였던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떠나니 의병의 군세는 약화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상제님께서는 “최익현의 거사로써 천지신명이 크게 움직인 것은 오로지 그 혈성(血誠)의 감동에 인함이나, 그의 재질이 대사를 감당치 못할 것이고 한재(旱災 : 가뭄)까지 겹쳤으니 무고한 생민의 생명만을 잃을 것이니라. 때는 실로 흥망의 기로이라, 의병을 거두고 민족의 활로를 열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윤 4월 20일, 최익현과 임병찬은 남은 병력을 데리고 ‘왜놈이라면 한 놈이라도 더 죽여야 한다’는 굳은 결심으로 최후까지 싸우기로 했다. 그러나 척후병이 와서 일본군이 아니라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가 쳐들어온다고 보고하니, 최익현은 “나는 동족끼리 서로 싸우는 일은 원치 않으니 너희는 즉각 해산하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제 남은 의병의 수는 고작 22명뿐이었다.
포위망을 좁혀 온 진위대는 순창객사(淳昌客舍)에 숨은 이들을 포위하여 총을 쏘기 시작했다. 최익현은 임병찬에게 22명의 이름을 벽 위에 써 붙이도록 한 뒤 “지금 우리는 반드시 죽기를 각오하고 버틸 따름이다. 흔들리지 마라.”고 당부하였다. 그 옛날 이순신 장군이 2,300명 군사와 12척에 불과한 전력으로 12만 병력에 200여 척이 넘는 일본군과 맞서 싸울 때 “죽기를 각오하면 반드시 살 것이요, 회피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라고 말했던 것이 상기되는 순간이었다. 탄환은 벽에 세차게 부딪히면서 더욱 거세게 날아들었고, 최익현의 당부대로 남은 의병들은 굳은 마음으로 묵묵히 탄환 세례를 견디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탄환 한 발이 벽을 뚫고 와서는 정낙언(鄭樂彦, 1872~1906)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윤 4월 23일,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최익현과 임병찬은 의병을 일으킨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순창에서 체포되었고, 이들은 모두 서울로 압송되었다. 상제님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시고, “일심(一心)의 힘이 크니라. 같은 탄알 밑에서 정낙언은 죽고 최면암(최익현)은 살았느니라. 이것은 일심의 힘으로 인함이니라. 일심을 가진 자는 한 손가락을 튕겨도 능히 만 리 밖에 있는 군함을 물리치리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그러시면서 상제님께서는 “글 읽던 최익현이 의기를 떨쳐 칼과 창을 쥐었지만, 10월 대마도에서 널에 얹혀 있다가 흔들흔들 고국 산하에 돌아오도다(讀書崔益鉉 義氣束劒戟 十月對馬島 曳曳山河 )”라고 그의 만장(輓章)을 지으셨다. 만장이란 죽은 사람을 애도하며 짓는 글이니 상제님께서는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죽을 것임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과연 그해 6월 25일, 최익현은 일제에 의해 감금 3년 형을 받고 7월 8일 대마도에 압송되었다. 유배를 당한 최익현은 고령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10월 19일에 병이 들었는데, 최익현을 옆에서 지켜 본 임병찬은 “선생께서 병이 나면서부터 20여 일에 이르기까지 혹은 평좌하시고, 혹은 꿇어앉고, 혹은 엎드리고, 혹은 기대기도 하셨으나 한 번도 드러눕지 않으시니, 여기에 선생의 평소 소양(素養)의 훌륭하심은 다른 사람이 따를 수가 없음을 알았다.”고 증언하였다. 결국 최익현은 한 달도 채 못 버티고 11월 17일(양력 1907년 1월 1일) 새벽에 병으로 순국하기에 이른다. 훗날 상제님께서는 ‘천세천세천천세(千歲千歲千千歲) 만세만세만만세(萬歲萬歲萬萬歲) 일월최익현(日月崔益鉉)’이라는 글을 쓰시고 불사르시며 최익현의 원을 풀어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