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관련 글 : 「황극 그리고 정역」, 대순회보 106호(2010);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71: 만동묘로 황극신을 옮기는 공사」, 대순회보 135호(2012)
상제님께서는 황극신이 우리나라로 오게 될 인연은 송시열의 만동묘에서 비롯된다고 밝혀주셨다. 송시열은 명나라의 후계자인 조선이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을 연호로 사용하고, 만동묘를 지어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 준 명나라 14대 황제인 만력제(萬曆帝)와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의 신위를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송시열은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군신관계로 파악하고 명이 멸망한 이후에는 조선이 중화문명의 계승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송시열이 죽은 뒤,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는 1703년에 스승의 유지(遺志)를 이어 충북 괴산에 만동묘를 세우고 명 황실에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만동묘의 위세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만동묘로 황극신을 옮기시는 공사
상제님께서는 황극신이 우리나라로 오게 될 인연은 송시열의 만동묘에서 비롯된다고 밝혀주셨다. 송시열은 명나라의 후계자인 조선이 명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을 연호로 사용하고, 만동묘를 지어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 준 명나라 14대 황제인 만력제(萬曆帝)와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의 신위를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송시열은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군신관계로 파악하고 명이 멸망한 이후에는 조선이 중화문명의 계승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송시열이 죽은 뒤,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는 1703년에 스승의 유지(遺志)를 이어 충북 괴산에 만동묘를 세우고 명 황실에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만동묘의 위세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만동묘의 제사는 화양서원에서 주관하였는데, 그 서원에서 ‘아무 날 아무 시에 만동묘에서 제사를 거행하니, 제수전에 필요한 얼마를 당장 갖다 바쳐라.’는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송하면, 이유 불문하고 전답을 팔아서라도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여 무조건 대어야 했다. 화양묵패는 벼슬아치에게든 양반에게든 서민에게든 신분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발송되었고, 이에 불응하면 당장 끌려가 협박과 폭언을 듣고 매를 맞는 등 심한 능욕을 당했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 서원의 행패야 심했던 것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만동묘를 등에 업은 화양서원의 횡포야말로 가장 극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출세하기 전 이곳저곳을 떠돌던 젊은 시절에 만동묘 화양서원을 지나다가 그곳의 유생들에게 잡혀 큰 봉변을 당했던 일이 있었고, 그 치욕을 결코 잊을 수 없어 정권을 잡자마자 1865년에 만동묘에 모셔진 명 황실의 신위를 서울로 옮겨버리고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아예 폐쇄시켜버렸던 사건은 꽤나 유명하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유림들은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다시 복원시켰으나 일제는 1942년에 강제로 철거해버렸고, 그 후 한동안 터만 남아 있다가 최근에 다시 복원되었다.
명나라 황실의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라는 존재는 중국을 사대한다는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지 간에 지난 날 명 황실을 제사 지내왔다는 사실은 황극신이 우리나라로 넘어올 수 있게 되는 인연을 만들어주었고, 그것은 우리나라가 중국을 능가하는 문명을 지니는 상등국이 될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다시 상제님께서는 와룡리에서 동곡으로 돌아오셔서 “청주 만동묘(萬東廟)에 가서 청국(淸國) 공사를 행하려 하나 길이 멀고 왕래하기 어렵고 불편하므로 청도원(淸道院)에서 공사를 행하리라.” 하시고 동곡과 이웃하고 있는 마을인 청도원으로 가셨다. 그때 청도원에는 류찬명(柳?明)과 김송환(金松煥)이 살고 있었다. 상제님께서는 류찬명의 집에서 천지의 대신문(大神門)을 여시고 공사를 행하셨으니, 김송환 역시 옆에서 상제님의 시중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