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관련 글 :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81: 송상현 해원공사」, 대순회보 145호(2013);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82: 남아 15세면 호패를 찬다 하느니 무슨 일을 못하리오」, 대순회보 146호(2013)
1909[己酉]년 4월, 상제님께서는 함열 회선동(會仙洞)에 사는 김보경(金甫京, 1860∼1934)의 집으로 가셨다. 그곳에서 백지 넉 장을 펼치시고 종이 모서리마다 ‘泉谷’이라 쓰신 뒤, 김송환과 이치복으로 하여금 그 종이를 마주 잡게 하시며 “그 모양이 상여(喪輿)의 호방산(護防傘)과 같도다.” 하고 말씀하셨다. 전주 용머리고개에서부터 줄곧 상제님을 모시고 따라왔던 이치복이 천곡(泉谷)이 무슨 뜻인지 여쭈었더니, 상제님께서는 “옛날에 절사(節死)한 원의 이름이라.”고 일러주셨다
송상현 해원공사
1909[己酉]년 4월, 상제님께서는 함열 회선동(會仙洞)에 사는 김보경(金甫京, 1860∼1934)의 집으로 가셨다. 그곳에서 백지 넉 장을 펼치시고 종이 모서리마다 ‘泉谷’이라 쓰신 뒤, 김송환과 이치복으로 하여금 그 종이를 마주 잡게 하시며 “그 모양이 상여(喪輿)의 호방산(護防傘)과 같도다.” 하고 말씀하셨다. 전주 용머리고개에서부터 줄곧 상제님을 모시고 따라왔던 이치복이 천곡(泉谷)이 무슨 뜻인지 여쭈었더니, 상제님께서는 “옛날에 절사(節死)한 원의 이름이라.”고 일러주셨다.
천곡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의 호이다. 송상현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그는 선조 3년(1570)에 사마시에서 장원하고 선조 9년에 문과에 올라 대간직(臺諫職)을 역임한 후 질정관(質正官), 서장관(書狀官) 등을 거쳐 1591년에 동래부사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당시 항간에는 왜적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고 있어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전하니, 송상현의 아버지인 송복흥(宋復興, 1527∼1594)은 난(難)에 회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직(職)이니 죽음을 피할 이유가 없다고 의연하게 말했다. 송상현 역시 친한 벗이던 김장생(金長生, 1548∼1631)에게 만약 왜적이 쳐들어오면 반드시 죽음으로 막겠다는 맹세를 담은 서신을 보낼 정도로, 사지(死地)에 들어가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과연 이듬해가 되자 대규모의 왜군이 쳐들어와서 4월 14일에 정발(鄭撥, 1553∼1592)이 지키는 부산진성을 순식간에 함락시켰다.
그리고 2만의 왜군이 송상현 이하 3천이 지키는 동래성으로 밀어닥쳤다. 왜군의 기세에 놀란 경상좌수사 박홍과 경상좌병사 이각은 대의(大義)를 위해 함께 성을 지켜낼 것을 주장하는 송상현의 뜻을 저버리고 도망쳐버렸다. 왜군은 동래성 남문 밖에 진을 치고 ‘戰則戰矣 不戰則假道(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라).’ 는 팻말을 내세웠다. 이를 본 송상현은 ‘戰死易 假道難(싸우다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키기는 어렵다).’는 글을 내다 걸게 하였다. 4월 15일 왜군들이 성을 포위한 채 공격해 들어오자 부녀자들까지 나서서 기와를 던지는 등 결사 항전하였으나, 조총이라는 우세한 무기와 월등한 병력 앞에 중과부적으로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무너진 성 벽 사이로 왜군들이 쏟아져 들어오자 송상현은 남문의 누각 위에 올라가 갑옷 위에 정복을 덧입고 앉았는데, 그때 왜장 중 한 명인 다이라 스키마스(平調益)가 송상현을 구하기 위해 급히 달려와 어서 피하라고 옷깃을 잡아끌었다. 다이라 스키마스는 예전에 사신으로 왔을 때 송상현을 만나보고 그의 인물됨에 감동하여 존경해오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송상현은 그를 물리치고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한 뒤 손가락에 피를 내어 부채에 ‘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외로운 성에는 달무리가 희미한데, 여러 진(鎭)에서 온 군사들은 (죽음을 맞이하여) 베개를 높이 하고 편히 누워있네.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무겁고, 부모와 자식의 은혜는 가볍기만 하노라].’는 시를 적어 하인으로 하여금 부친에게 전하게 한 뒤 왜군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에 놀란 다이라 스키마스는 송상현을 해친 왜군을 잡아 끌어내 목을 쳤다. 송상현의 충절에 감동한 왜군들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동문 밖에다 묻고 ‘충신 송아무개의 묘’라는 푯말을 세운 뒤 시를 지어 제향하였다. 그러자 홀연히 보랏빛 기운이 떠올라 오랫동안 하늘에 걸쳐있었다고 한다.
상제님께서 백지 네 모서리에 ‘泉谷’이라 쓰시며 상여 모양으로 만드신 공사는 송상현의 절의를 높이 평가하시어 그의 원을 풀어주고자 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송상현이 왜군에게 죽임을 당할 때, 군관 송봉수와 김희수, 교수 노개방 등 십 수 명도 그를 지키다가 옆에서 같이 순절하였다. 또한 양산군수 조영규 등 동래성에 있었던 3천의 군관민이 죽음을 불사하고 항거하다가 모두 죽음을 당하였으니, 지난 2005년 6월에 부산 지하철 3호선 수안동 역 주변 공사장에서 발견된 아래턱이 창에 의해 날카롭게 잘려나간 남자의 유골, 앉혀진 채로 위에서 칼로 세 차례나 살해를 당한 20대 여자의 유골, 조총이 뒤에서 뚫고 나간 흔적을 보여주는 5세 이하 유아의 부서진 두개골 등 120여 구의 참혹한 유골들은 당시의 참혹상을 짐작케 한다. 따라서 창졸간의 침략에 모든 행복을 빼앗기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이들의 원 역시 하늘에 닿아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상제님께서 보신 송상현 해원공사가 단순히 송상현 1인의 해원에 국한됨은 아닐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