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관련 글 :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57: 상제님의 믿음을 방해한 아내의 운명」, 대순회보 121호(2011);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58: 농암에서의 공사와 사명기」, 대순회보 122호(2011)
상제님께서는 농암을 떠나 동쪽으로 10여 리 정도 떨어진 피노리(避老里) 이화춘(李化春)의 집으로 가셨다. 이 마을은 13년 전에 전명숙이 잡혔던 곳이다. 1894년 겨울에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전명숙은 쫓기다가 순창 접주 오동호(吳東昊)의 안내를 받아 그의 매가(妹家)가 있는 피노리로 숨어들었다. 전명숙은 갑자기 열이 나면서 앓아 눕게 되자 심복인 김경천(金敬天)을 밖으로 내보내 약도 짓고 바깥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김경천은 원래 장성군 이방이었던 사람으로 전명숙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던 터였다. 그는 약방을 찾다가 문득 전명숙에게 현상금이 천 냥 걸려있다는 방을 보게 되었다. 재물에 눈이 먼 그는 약을 지어다 주고는 그곳을 빠져 나와 관아에 고발하고 동네 불량배 7∼8명을 동원하여 전명숙을 덮쳤다. 전명숙은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가 다리를 얻어맞고 붙잡혀 서울에 압송되었다. 그는 그 다음 해인 1895년 3월 29일에 교수형에 처해졌으니, 백의한사로 일어나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한 사람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던 만고의 명장은 을 품은 채 세상을 뜨고야 말았다.
농암에서의 공사와 사명기
다음 날 상제님께서는 농암을 떠나 동쪽으로 10여 리 정도 떨어진 피노리(避老里) 이화춘(李化春)의 집으로 가셨다. 이 마을은 13년 전에 전명숙이 잡혔던 곳이다. 1894년 겨울에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전명숙은 쫓기다가 순창 접주 오동호(吳東昊)의 안내를 받아 그의 매가(妹家)가 있는 피노리로 숨어들었다. 전명숙은 갑자기 열이 나면서 앓아 눕게 되자 심복인 김경천(金敬天)을 밖으로 내보내 약도 짓고 바깥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김경천은 원래 장성군 이방이었던 사람으로 전명숙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던 터였다. 그는 약방을 찾다가 문득 전명숙에게 현상금이 천 냥 걸려있다는 방을 보게 되었다. 재물에 눈이 먼 그는 약을 지어다 주고는 그곳을 빠져 나와 관아에 고발하고 동네 불량배 7∼8명을 동원하여 전명숙을 덮쳤다. 전명숙은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가 다리를 얻어맞고 붙잡혀 서울에 압송되었다. 그는 그 다음 해인 1895년 3월 29일에 교수형에 처해졌으니, 백의한사로 일어나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한 사람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던 만고의 명장은 을 품은 채 세상을 뜨고야 말았다.
상제님께서는 그런 전명숙의 을 풀어주시기 위하여 이곳에 사명기(司命旗)를 세우기로 하셨다. 상제님께서는 이화춘에게 누런 개 한 마리를 잡고 술 한 동이를 마련하게 하신 뒤, 뒷산 소나무 숲에서 가장 큰 소나무 한 그루와 남쪽 양달에 있는 황토를 파오게 하셨다. 또 백지 네 장을 청색, 홍색, 황색의 세 색깔로 물들여서 모두 잇고, 베어 온 소나무의 한 윗가지에 달게 하신 후, 백지 세 장에 시천주를 각각 쓰시고 그 종이 세 장에 황토를 조금씩 싸서 함께 이은 뒤 소나무 가지에 달고 나무를 집 앞에 세우셨으니, 그 모양이 마치 깃대와 같았다. 상제님께서는 종도들에게 “이곳에서 전명숙이 잡혔도다. 그는 사명기(司命旗)가 없어서 포한(抱恨)하였나니 이제 그 기를 세워주고 해원케 하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다시 사명기 한 폭을 더 지어 높은 소나무 가지에 달았다가 떼어 불사르시어 최수운도 해원케 하셨다.
이 무렵 김형렬은 동곡에서 상제님의 명을 받들고 있었으나 신원일이 불평을 하므로 다시 돌아와서 상제님께 그 사실을 아뢰었다. 상제님께서 “이도삼을 불러서 행하라.”고 일러주시니, 김형렬은 다시 이도삼을 데리고 동곡으로 가서 김광찬과 함께 상제님의 명을 완수하였다. 김형렬이 김갑칠을 상제님께 보내 일을 무사히 마쳤음을 고하니, 상제님께서는 김갑칠에게 양 한 마리를 사 주시면서 “내가 돌아가기를 기다리라.”고 하셨다.